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드워드 4세 (문단 편집) === 말년 === 1475년 프랑스 원정을 했는데 '''피키니 조약'''으로 철수하는 대신 [[금화]] 75,000 크라운을 일시불로 우선 받고 매년 50,000 크라운을 연공으로 받기로 협약했다. 그의 재위 마지막 10년 동안에는 법 제도를 개선했는데 웨일스와 웨일스 경계 지방에는 왕실 영지를 토대로 위원회를 만들어 아직 갓난아이였던 자신의 후계자 [[에드워드 5세|에드워드]]의 이름으로 활동했다. 이렇게 잉글랜드 영토였지만 자주 말썽을 부리던 웨일스는 완전히 잉글랜드에 복속하게 되었다. 그는 윈저에 세인트 조지 성당을 다시 짓고 서적을 대량으로 수집했는데 이 서적들은 나중에 [[대영박물관]]이 자랑하는 구 왕립 도서관의 기틀이 되었다. 1482년 프랑스의 루이 11세가 피키니 조약과 연공 상납을 거부하자 다시 프랑스 침공을 계획했으나, 폭식과 폭음으로 인한 말년의 심한 비만, 난잡한 여자 관계 때문에 병이 들어[* 특히 위장이 좋지못해서 구토를 자주하여 소화제를 달고 살 정도였다. 얼마나 구토가 심했냐면 식사를 하고 나면 반드시 구토를 할 정도였다. 에드워드 4세가 폭음과 폭식이 심했던것을 생각하면 이로 인해 위장병에 걸렸을 가능성이 높다.] 1483년 부활절 축제 때 갑자기 쓰러져 4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. 그는 엘리자베스에게서 3남 7녀를 보았으며 6명의 사생아를 남겼다. 하지만 에드워드 4세의 난잡한 여자 관계는 그의 사망 이후 장남 [[에드워드 5세]]와 차남 요크 공작 리처드 형제의 정당성에 대해 동생 [[리처드 3세]]가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었고, 자식들과 왕비 엘리자베스 우드빌이 위기에 처하는 데 큰 명분을 제공하고 말았다.[* 결국 리처드 3세는 에드워드 4세와 엘리자베스 우드빌의 혼인을 무효화시키고, [[에드워드 5세]]와 [[요크의 엘리자베스]]를 비롯한 에드워드 4세의 자식들도 전부 사생아로 격하시켰다. 이후 에드워드 5세와 요크 공작 리처드는 [[런던탑]]에 감금된 뒤 실종되는데, 정황상 암살이 유력하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